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6세 (문단 편집) == 즉위 == 1711년 '''형인 [[요제프 1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 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요절해버렸다!'''[* 정확히 말한다면 아들을 낳긴 했었으나 아들이 일찍 죽어버렸다. 장성한 딸들은 있었으나 여성인 딸들보다는 남성인 동생 카를이 우선으로 계승했다.] 졸지에 카를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애초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프랑스가 스페인 왕위까지 차지해 [[동군연합]]이 되어 유럽의 초강대국 탄생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카를 대공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모두 상속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오르자 동맹국들은 지금까지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 루이 14세에게는 적장자인 [[그랑 도팽 루이]]와 적장손 [[프티 도팽 루이]], 셋째 손자 베리 공작 샤를(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 2위), 프티 도팽의 아들들인 증손자 브르타뉴 공작 루이와, [[루이 15세|앙주 공작 루이]])가 있어서 전쟁 초기에는 앙주 공작 필리프가 프랑스 왕위까지 물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다만 전쟁 후반기 프랑스 [[부르봉 왕조]] 왕손들이 줄초상이 나면서 루이 14세의 직계 후손은 펠리페 5세를 제외하곤 증손자 앙주 공작 루이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이는 펠리페 5세가 조카를 제치고 프랑스 왕위에 오르기 위해 사국 동맹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가 물려받는 걸 저지하자고 제2의 [[카를 5세]]를 만들어주는 격이 되자 전쟁 명분이 소멸해 종결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자체는 영국, 프랑스 등이 따로 치고박다 1714년에야 끝났다.] 카를 6세는 스페인에 미련을 버렸고, 그 결과 루이 14세의 뜻대로 그의 둘째 손자인 펠리페 5세가 즉위했다. 카를 6세는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하는 평화조약을 맺고 [[나폴리 왕국|나폴리]]-[[사르데냐]]에 이르는 이탈리아 영토를 양도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카를 6세 재위 초기의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가장 큰 팽창을 이룬 상태였다. 그러나 이후 카를 6세의 정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빈(오스트리아)|빈]]과 [[류블랴나|라이바흐]], [[트리에스테]]를 잇는 상공업 도로를 건설하는 등 나름 의욕적으로 열심히 상공업 진흥 정책을 추구했으나 스페인 국왕을 자처하던 시절 데리고 있다 함께 오스트리아로 온 측근 세력들과 오스트리아의 전통적 귀족 세력의 갈등이 심했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의 치세는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 즉위초인 1718년, [[사부아 공자 외젠]]의 맹활약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바나트(Banat) 및 [[합스부르크 세르비아]]와 [[왈라키아 공국]] 서부를 확보했으며 1720년, [[사국 동맹 전쟁]]을 끝내며 [[사보이아 공국]]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반쯤 협박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교환했는데 이것이 카를 6세 시기 오스트리아의 몇 안되는 군사적 성공이었다. 먼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섣불리 개입했다가 손해를 봤다. 해당 전쟁의 결과가 좀 묘한 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위 자체[* 이 당시 폴란드는 거의 [[러시아 제국]]의 위성국 취급이었고 [[루이 15세]]는 프랑스의 국력을 믿고 어거지로 삥뜯으러 간 것이지 진지하게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장인]]의 복위를 바란 건 아니었다. 이후의 결과를 볼 때 루이 15세는 목표를 달성한 셈.]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잇게 되었다. 그러니까 폴란드 전역에선 이겼다는 말. 그러나 폴란드를 제외한 [[로렌 공국]]과 이탈리아 남부에서 프랑스-스페인에게 패배한 게 문제였다. 이로 인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고 얻어내 자신이 국왕을 겸하고 있던 [[나폴리 왕국]] 및 [[시칠리아 왕국]]을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카를로스 왕자]][* 원래는 스페인 영토였지만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인해 잃었다. 이 전쟁에 개입하여 승리한 결과 스페인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왕위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전에 예상한 펠리페 5세가 스페인의 왕으로 지명되었을 경우의 최악의 시나리오인 '''프랑스 2중대'''가 된다.]에게 넘겨주면서 남부 이탈리아 및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모조리 상실했다. 사위인 로렌 공작 [[프란츠 1세]]는 처가인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는데, 고향 로렌을 잃는 대신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대공국]]을 얻었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파르마 공국|파르마-피아첸차 공국]]을 얻었다.[* 파르마와 피아첸차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이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이 땅은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필리포 1세(파르마)|펠리페 왕자]]가 물려받아 부르봉파르마계가 만들어졌다. 현 스페인 좌파연합 '카를리스타 당'의 당수인 카를로스 우고, [[카를 1세]]의 아내이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어머니인 [[부르봉파르마의 치타|지타 황후]], [[미하이 1세]]의 부인 안 드 부르봉파르마가 이 가문 출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1738~9년 치러진 7차 튀르크 전쟁에서 참패, [[벨그라드 조약]]으로 1718년의 전쟁에서 얻어낸 영토를 대부분 토해내어[* 모두 잃은 건 아니고 [[합스부르크 세르비아]]와 [[왈라키아 공국]] 서부는 반환했으나 원래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 바나트는 지켜냈다.] 자신의 유일한 군사적 업적마저도 빛이 바랬다. 말년의 군사적인 실패로 주변국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깔보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 후 딸 [[마리아 테레지아]]는 즉위 초부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치러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